“사람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말을 되새김해 봅니다. 걷는다는 것은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응용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반대로 걷기를 멈춘다는 것은 자기 생각의 틀에 갇히는 뇌 활동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새로운 길동무, 타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이니 곧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백의 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는다. 왜 존재하는 나를 바라보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는 비는 밤을 새워 보슬보슬 내린다. 오늘 아침에도 걷기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도 세상을 청소하는 듯하다.
오늘은 길동무 19분과 함께 했습니다. 원래 공지된 코스는 6코스 만화리에서 신촌-계동-학원농장-청천까지 8.2km 정도를 걷는다. 그렇지만 19분의 길동무가 다시 차를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번거롭고, 보슬비를 핑계 삼아 6코스에서 파생된 6-b 학원농장길을 걸었다.
광주에서 김00, 반00 길동무 2분과 함께 출발하여 무장으로 돌아 돌아 오늘 걷을 길을 살짝 보면서 왔다. 2분은 길동무 이야기에 빠져들다가 청천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에는 여백이 더 필요하여 걷기 하시는 길동무가 많아진다. 아무튼 여백의 길에서 마음의 여백에 자신만의 행복감을 가져가셨으면 한다.
윤00 운영위원께서 걷기 준비 운동을 해주시고, 오늘 걷기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안내해 드리고 여백의 길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라는 구호하고 손뼉 치고 출발하였다.
공음면 용수리는 마을 전체 형상이 용의 꼬리 형국이라 한다. 용은 물이 있어야 잘 산다는 관념에 따라 청천마을 앞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서 용수마을 좋아졌다 한다. 용수천에 1942년 만들어진 예전 저수지 수변 길을 따라 길동무는 걷기 시작한다. 이 용수천 물은 대산천과 또 와탄천과 합수하여 법성포로 흘러간다.
매년 보리를 심는 맥랑길에 서서 예전 저수지와 황산이라 불리는 촛불산을 바라보면, 보리 새싹 넘어 공제선을 보면서, 평평한 야산 밑에 있는 충주박씨의 세거지인 평산마을 보면서 중여 마을에 이른다. 마을 길을 지나 능선을 타고 감탄 길에 들어선다. 여기저기 남겨진 무, 배추가 눈에 밟힌다.
19명의 길동무 감탄길에서 인증사진으로 남기고 보리밭의 보리를 보면서 도깨비 뽕나무가 있는 중앙밭과 노을밭 사이를 걷습니다. 비가 오지만 꼭 이런 날만 볼 수 있는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는 말없이 손가락의 힘을 받아들인다.
3.2km 걸었기 때문에 넓은들 화장실을 잠깐 이용하고 걷음을 재촉한다. 2004년 경관 농업 특구로 지정된 전망대 옆을 지나 의종(범종)을 타종하고 맹종죽이 욕심나는 길을 따라 한새골에 이른다. 한새골 옥당마을 이정표에 후미가 올 때까지 기다려 학원농장 명명에 대하여 안내한다. 이 지역의 옛 지명은 “황새골”“한새골”이다. 한새는 이 근방에 많이 서식하는 황새, 백로, 왜가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1963에 학원 농장을 설립한 이학여사(전 진의종 국무총리 부인)의 이름자 “학”과 이미지가 같아 들을 뜻하는 한자어 “원”과 합쳐 “학의들”이라는 뜻에서 “鶴園농장”이라 했다고 한다.
마중밭을 가로질러 이학여사의 생가터를 지나 비밀의 숲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백민(진의종국무총리) 기념관을 볼 수 있고, 커다란 불상과 독특한 도깨비 사천왕상, 그리고 드므가 있어서 여기가 이학여사의 개인 사찰이 있었던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비가 와서 야외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을 수 없어서 넓은들 카페로 들어간다. 적당하게 음료를 시키고 간식을 꺼내 먹으면서 길동무는 쉬어간다. 이00 선생님이 맛있는 백설기를 따끈하게 해오셔서 감사하게 먹는다. 11시 15분 다시 우비를 입고 전망대 근처에서 연두 보리밭을 배경으로 여백의 길 151회 출석부를 남긴다. 여백의~~길
도깨비가 그려져 있는 길을 따라 청농원의 길로 접어든다. 라벤더도 핑크뮬리도 없지만 연기가 나는 굴뚝을 보며 술암재에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가 술암재에 대하여 아는 만큼 알려드린다.
술암재는 남계 배환정을 기리기 위하여 1943년에 지어진 한옥 건물이다. 남계 선생님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지도자였다. 그는 한약방을 지금의 자리에서 경영했는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는 약값을 무료로,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겐 약값의 반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무장 접주”에 추대되어 대접주 손화중과 친분을 쌓았고, 황토현 전투, 전주성 점령 그 후 우금치 전투에 패하자 숨어지냈다고 한다. 평소 베푼 인덕으로 죽지 않고 재기하였다고 한다.
여백의 길 제151회차 6-b 코스 토요 정례걷기
“사람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말을 되새김해 봅니다. 걷는다는 것은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응용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반대로 걷기를 멈춘다는 것은 자기 생각의 틀에 갇히는 뇌 활동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새로운 길동무, 타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이니 곧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백의 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는다. 왜 존재하는 나를 바라보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는 비는 밤을 새워 보슬보슬 내린다. 오늘 아침에도 걷기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도 세상을 청소하는 듯하다.
오늘은 길동무 19분과 함께 했습니다. 원래 공지된 코스는 6코스 만화리에서 신촌-계동-학원농장-청천까지 8.2km 정도를 걷는다. 그렇지만 19분의 길동무가 다시 차를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번거롭고, 보슬비를 핑계 삼아 6코스에서 파생된 6-b 학원농장길을 걸었다.
광주에서 김00, 반00 길동무 2분과 함께 출발하여 무장으로 돌아 돌아 오늘 걷을 길을 살짝 보면서 왔다. 2분은 길동무 이야기에 빠져들다가 청천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에는 여백이 더 필요하여 걷기 하시는 길동무가 많아진다. 아무튼 여백의 길에서 마음의 여백에 자신만의 행복감을 가져가셨으면 한다.
윤00 운영위원께서 걷기 준비 운동을 해주시고, 오늘 걷기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안내해 드리고 여백의 길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라는 구호하고 손뼉 치고 출발하였다.
공음면 용수리는 마을 전체 형상이 용의 꼬리 형국이라 한다. 용은 물이 있어야 잘 산다는 관념에 따라 청천마을 앞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서 용수마을 좋아졌다 한다. 용수천에 1942년 만들어진 예전 저수지 수변 길을 따라 길동무는 걷기 시작한다. 이 용수천 물은 대산천과 또 와탄천과 합수하여 법성포로 흘러간다.
매년 보리를 심는 맥랑길에 서서 예전 저수지와 황산이라 불리는 촛불산을 바라보면, 보리 새싹 넘어 공제선을 보면서, 평평한 야산 밑에 있는 충주박씨의 세거지인 평산마을 보면서 중여 마을에 이른다. 마을 길을 지나 능선을 타고 감탄 길에 들어선다. 여기저기 남겨진 무, 배추가 눈에 밟힌다.
19명의 길동무 감탄길에서 인증사진으로 남기고 보리밭의 보리를 보면서 도깨비 뽕나무가 있는 중앙밭과 노을밭 사이를 걷습니다. 비가 오지만 꼭 이런 날만 볼 수 있는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는 말없이 손가락의 힘을 받아들인다.
3.2km 걸었기 때문에 넓은들 화장실을 잠깐 이용하고 걷음을 재촉한다. 2004년 경관 농업 특구로 지정된 전망대 옆을 지나 의종(범종)을 타종하고 맹종죽이 욕심나는 길을 따라 한새골에 이른다. 한새골 옥당마을 이정표에 후미가 올 때까지 기다려 학원농장 명명에 대하여 안내한다. 이 지역의 옛 지명은 “황새골”“한새골”이다. 한새는 이 근방에 많이 서식하는 황새, 백로, 왜가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1963에 학원 농장을 설립한 이학여사(전 진의종 국무총리 부인)의 이름자 “학”과 이미지가 같아 들을 뜻하는 한자어 “원”과 합쳐 “학의들”이라는 뜻에서 “鶴園농장”이라 했다고 한다.
마중밭을 가로질러 이학여사의 생가터를 지나 비밀의 숲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백민(진의종국무총리) 기념관을 볼 수 있고, 커다란 불상과 독특한 도깨비 사천왕상, 그리고 드므가 있어서 여기가 이학여사의 개인 사찰이 있었던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비가 와서 야외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을 수 없어서 넓은들 카페로 들어간다. 적당하게 음료를 시키고 간식을 꺼내 먹으면서 길동무는 쉬어간다. 이00 선생님이 맛있는 백설기를 따끈하게 해오셔서 감사하게 먹는다. 11시 15분 다시 우비를 입고 전망대 근처에서 연두 보리밭을 배경으로 여백의 길 151회 출석부를 남긴다. 여백의~~길
도깨비가 그려져 있는 길을 따라 청농원의 길로 접어든다. 라벤더도 핑크뮬리도 없지만 연기가 나는 굴뚝을 보며 술암재에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가 술암재에 대하여 아는 만큼 알려드린다.
술암재는 남계 배환정을 기리기 위하여 1943년에 지어진 한옥 건물이다. 남계 선생님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지도자였다. 그는 한약방을 지금의 자리에서 경영했는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는 약값을 무료로,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겐 약값의 반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무장 접주”에 추대되어 대접주 손화중과 친분을 쌓았고, 황토현 전투, 전주성 점령 그 후 우금치 전투에 패하자 숨어지냈다고 한다. 평소 베푼 인덕으로 죽지 않고 재기하였다고 한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너무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길라잡이는 그저 행복했다.
19분의 길동무님 덕분에 행복한 걷기였습니다.
2024.1.20.
여백의 길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