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만화리 길은 무장면의 마지막 장소에서 개천 하나 넘으면 공음면의 첫 코스로 축동마을이다. 안개 자욱한 만화리 모정에서 태양의 기운을 두 손 높이 들고 받는다. 비닐하우스의 여리디여린 쪽파는 잘 있나 살피면서 농부의 마음으로 13명의 길동무와 걷음을 시작한다. 축동의 옛 이름이 방죽안이라 한다. 그리고 지형이 선조들이 이야기한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축동이라고도 한다. “왜 소우자를 써서 우동이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 길동무 창공님의 발문에 또 호기심이 동한다. 만화리와 축동을 가르는 실개천은 무장면 두암저수지에서 몸을 푼 뒤 영광 법성포를 지나 서해로 큰길을 나선다. 과치제에서 내려온 실개천을 기준으로 무장면과 공음면의 행정 구역이 나뉜다. 축동 입구에 교회의 십자가가 종탑이 부서져 있어서 늘 마음 쓰인다. 이름 모를 교회를 뒤로하고 느티나무밭을 지나 멍멍이 소리를 들으며 동쪽 동산길을 오른다. 한 줄기 빛이 들어선 숲길을 걷다 보면 화강암이 풍화된 굵은 모래를 만난다. 봉우리 하나 깎아 개간한 비탈진 밭에는 고구마가 자라곤 했었다. 여백의 길에서 만난 개간된 밭에서는 밭고랑을 등고선에 직각으로 낸다. 토양 침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농부의 이야기이다. 토양층이 두꺼워 토양의 침식보다는 물 빠짐이 더 중요한 고구마, 땅콩 등을 재배하기 때문이란다. 잘생긴 소나무 하나 자리를 잡고 이곳이 진주정씨 선산임을 알 수 있는 봉분과 맞닥뜨린다. 왕제산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유정, 구정마을에서 한 1년쯤 주인이 없는 억새가 무성하게 마당을 지키고 있는 빈집이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다. 그 왼쪽은 구정마을 경로당이다. 구정마을은 내려오는 이야기를 빌면 마을 이름이 굴챙이라고 했고, 9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유정길 논길을 따라 옥녀봉을 정면에 두고 걷다 보면 논에는 마시멜로(곤포 사일로우)에서 하얀 서리를 본다. 박oo 시인은 그 감성을 살리셔서 손으로 만져 눈을 만든다. 전봇대에 노란 네모난 점 하나는 여백의 길 이정표가 되어 길동무들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밭에는 실하디실한 김장용 배추가 속을 채우고 있다. 이미 맛나 보인다. 축사의 마시멜로 성벽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지난 2년간 쇠죽골의 골재채취가 끝난 밭에서는 고구마가 첫 농사이다. 그리고 쪽파를 심은 듯하다. 11시까지 가야 하는 일정으로 축지법을 사용하다 보니 왕제산에 기대어 자리 잡은 신촌마을 노인정을 건너 뛴다. 왕제산(王帝山)은 왕산, 여시뫼봉, 왕재산이라고도 불렸다. 선인과 옥녀 형상의 산이라 하였고, 풍수지리상 여우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여시뫼봉’이라고 불렸다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무장현 관아를 점령한 후 왕제산에 훈련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용수천 서쪽에 옥녀봉에 기대어 사는 보천마을을 보면서 물길을 따라 도란도란 걷는다. 비닐하우스 온실 안에는 멜론을 수확하고 남은 줄기만 뎅그렇게 남아 있다. 서당골 경사진 언덕배기 밭은 삼포였는데 인삼을 거두어 드린 후 그곳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밭 경작을 위한 급수탑에는 담쟁이가 얼굴을 불그스레 바람과 함께 반겨준다. 작년에는 고개 넘어 밭에는 검은 보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그곳도 실한 김장 배추가 소리를 내며 철이 들고 있다. 약 1시간을 걷다 보니 출발점에서 4.2km 지점에 왔다. 그곳에는 생명샘교회가 있어서 화장실 이용과 약간의 휴식을 한다. 마치 산티아고 길에 성당이 있어서 쉼터를 제공하듯 여기가 그런 곳 같다. 교회 목사님께서 건빵과 따뜻한 음료를 주셔서 감사하게 먹고 길을 재촉한다. 두 번째 축지법을 쓴다. 계동 마을 정자와 독시암(돌샘)이라는 석정마을 물길을 따라 걷는 것과 달리 씨앗등로를 옛길구간을 따라 학동저수지에 드리운 파란 가을 하늘을 마주하면서 학원 농장길에 들어선다. 이 길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낙엽이 뒹굴고 있는 황토밭, 농부가 대지에 그림을 그리듯 땅을 골라 놓은 학원 농장에 들어선다. 학원농장은 고창 무장면 출신으로 제17대 국무총리를 지낸 백민 진의종과 부인 이학 여사가 1960년대 초에 이곳 광활한 야산 약 10만 평을 개간하여 조성한 곳이다. 1960년대는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하였다고 하고, 1970년대는 목초를 재배하여 한우 비육 사업을, 1980년대에는 보리, 수박, 땅콩 등 경작하였다고 한다. 1992년 장남 진영호가 귀농하면서 보리와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면서 장미와 카네이션 등 화훼 농업을 병행하여 관광농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관광객들의 경관 관광 욕구에 맞게 보리농사는 계속하고 콩을 메밀로 전환하여, 보리와 메밀을 번갈아 가면서 재배하면서 2004년 전국 최초 학원농장 주변이 ‘경관농업 특구’로 지정되었다. 2004년부터 매년 4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고 있다. 평소 걷는 학원 농장길과 달리 이학 여사가 거주했던 흙집과 공제선과 호랑이 왕대밭과 무밭을 지나 잉어못 쉼터를 본다. 청보리밭에 홀로 견디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 집착하는 사진을 찍고 연방죽과 숙골제에서 줄기만으로 내년 연꽃을 기대한다. 언덕배기의 길에서는 붉은 황토, 그리고 쪽파, 배추들이 길동무를 맞아준다.
노란 은행나무 잎새만 달리 능선을 지나면 청농원이다. 청농원은 라벤더와 핑크뮬리 그리고 오래된 한옥 펜션으로 알려진 곳이다. 작년 10월 나는 이곳 한옥 제실 ‘술암제’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배환정 동학 무장 접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솔깃하였다. 그리고 술암제에 진열된 액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계 배환정(裵煥廷)은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였다. 본관이 달성으로 1864년 이곳 청천마을 배후근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배환정은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무료로,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게는 약값의 반액만 받았다고 합니다. 지역민의 마음을 얻어 추대형식으로 무장 접주가 되어 손화중과 교분을 쌓고 황토재(정읍) 전투, 장성 황룡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합니다. 1894년 4월 27일에 전주성에 입성한 후 전주화약을 맺고 퇴각합니다. 그해 9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자 숨어지내다 체포되었지만, 평소 베푼 인덕으로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1943년 배환정을 위하여 술암제라는 제각을 지었다. 그 제각은 이제는 구조가 독특한 한옥 펜션으로 이용되고 있다. 핑크뮬리와 라벤더를 뒤로하고 조금 더 지나면 도착점인 공음면 청천마을이다. 이번 주는 고창군 공동체 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청천마을에서 마을 가꾸기를 위해 애쓰시는 청천마을 주민들과 상견례가 있었다. 아름다운 동행이 될 것같이 흐뭇하다. 따뜻한 차와 귤을 주시고, 마을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하다. 여백의 길, 길동무 두 분은 답례로 시를 낭송하여 마을 분들께 고마움을 표하였다. 1942년 만들어진 예전 저수지의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힘들어하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여백의 길동무들은 플로깅(plogging)을 하면서 걸어야겠다. 예정이 없던 행사를 위해 예전저수지에 반영된 황산을 촬영하면서 바람의 언덕을 걷었습니다. 맥랑이 있었던 곳에는 밭 콩흐(빈센트 반 고흐를 흉내 내, 밭에 쌓아져 있는 콩 덤이)를 보면서 중여마을을 지나 상예마을에 접어든다. 중여와 상예마을은 터 잡을 당시에는 ‘예지(예전)’이라고 불렀다. 상예 마을은 본디 상여(上餘)였다. 예측건대 마을 이름으로 상여라고 부르기에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상예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마을 분들이 한땀 한땀 수를 놓은 꽃수 목걸이와 팔지를 선물로 주셨다. 역시 부족하지만, 정현종의 방문객을 낭송하여 드렸고, 박oo 시인과 산골 소녀께서 시를 올려 드렸다. 정말 필경 환대임이 틀림없다. 여백의 길의 끝에서 웃음이 번진다.
무장 만화리 길은 무장면의 마지막 장소에서 개천 하나 넘으면 공음면의 첫 코스로 축동마을이다. 안개 자욱한 만화리 모정에서 태양의 기운을 두 손 높이 들고 받는다. 비닐하우스의 여리디여린 쪽파는 잘 있나 살피면서 농부의 마음으로 13명의 길동무와 걷음을 시작한다. 축동의 옛 이름이 방죽안이라 한다. 그리고 지형이 선조들이 이야기한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축동이라고도 한다. “왜 소우자를 써서 우동이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 길동무 창공님의 발문에 또 호기심이 동한다. 만화리와 축동을 가르는 실개천은 무장면 두암저수지에서 몸을 푼 뒤 영광 법성포를 지나 서해로 큰길을 나선다. 과치제에서 내려온 실개천을 기준으로 무장면과 공음면의 행정 구역이 나뉜다. 축동 입구에 교회의 십자가가 종탑이 부서져 있어서 늘 마음 쓰인다. 이름 모를 교회를 뒤로하고 느티나무밭을 지나 멍멍이 소리를 들으며 동쪽 동산길을 오른다. 한 줄기 빛이 들어선 숲길을 걷다 보면 화강암이 풍화된 굵은 모래를 만난다. 봉우리 하나 깎아 개간한 비탈진 밭에는 고구마가 자라곤 했었다. 여백의 길에서 만난 개간된 밭에서는 밭고랑을 등고선에 직각으로 낸다. 토양 침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농부의 이야기이다. 토양층이 두꺼워 토양의 침식보다는 물 빠짐이 더 중요한 고구마, 땅콩 등을 재배하기 때문이란다. 잘생긴 소나무 하나 자리를 잡고 이곳이 진주정씨 선산임을 알 수 있는 봉분과 맞닥뜨린다. 왕제산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유정, 구정마을에서 한 1년쯤 주인이 없는 억새가 무성하게 마당을 지키고 있는 빈집이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다. 그 왼쪽은 구정마을 경로당이다. 구정마을은 내려오는 이야기를 빌면 마을 이름이 굴챙이라고 했고, 9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유정길 논길을 따라 옥녀봉을 정면에 두고 걷다 보면 논에는 마시멜로(곤포 사일로우)에서 하얀 서리를 본다. 박oo 시인은 그 감성을 살리셔서 손으로 만져 눈을 만든다. 전봇대에 노란 네모난 점 하나는 여백의 길 이정표가 되어 길동무들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밭에는 실하디실한 김장용 배추가 속을 채우고 있다. 이미 맛나 보인다. 축사의 마시멜로 성벽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지난 2년간 쇠죽골의 골재채취가 끝난 밭에서는 고구마가 첫 농사이다. 그리고 쪽파를 심은 듯하다. 11시까지 가야 하는 일정으로 축지법을 사용하다 보니 왕제산에 기대어 자리 잡은 신촌마을 노인정을 건너 뛴다. 왕제산(王帝山)은 왕산, 여시뫼봉, 왕재산이라고도 불렸다. 선인과 옥녀 형상의 산이라 하였고, 풍수지리상 여우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여시뫼봉’이라고 불렸다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무장현 관아를 점령한 후 왕제산에 훈련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용수천 서쪽에 옥녀봉에 기대어 사는 보천마을을 보면서 물길을 따라 도란도란 걷는다. 비닐하우스 온실 안에는 멜론을 수확하고 남은 줄기만 뎅그렇게 남아 있다. 서당골 경사진 언덕배기 밭은 삼포였는데 인삼을 거두어 드린 후 그곳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밭 경작을 위한 급수탑에는 담쟁이가 얼굴을 불그스레 바람과 함께 반겨준다. 작년에는 고개 넘어 밭에는 검은 보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그곳도 실한 김장 배추가 소리를 내며 철이 들고 있다. 약 1시간을 걷다 보니 출발점에서 4.2km 지점에 왔다. 그곳에는 생명샘교회가 있어서 화장실 이용과 약간의 휴식을 한다. 마치 산티아고 길에 성당이 있어서 쉼터를 제공하듯 여기가 그런 곳 같다. 교회 목사님께서 건빵과 따뜻한 음료를 주셔서 감사하게 먹고 길을 재촉한다. 두 번째 축지법을 쓴다. 계동 마을 정자와 독시암(돌샘)이라는 석정마을 물길을 따라 걷는 것과 달리 씨앗등로를 옛길구간을 따라 학동저수지에 드리운 파란 가을 하늘을 마주하면서 학원 농장길에 들어선다. 이 길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낙엽이 뒹굴고 있는 황토밭, 농부가 대지에 그림을 그리듯 땅을 골라 놓은 학원 농장에 들어선다. 학원농장은 고창 무장면 출신으로 제17대 국무총리를 지낸 백민 진의종과 부인 이학 여사가 1960년대 초에 이곳 광활한 야산 약 10만 평을 개간하여 조성한 곳이다. 1960년대는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하였다고 하고, 1970년대는 목초를 재배하여 한우 비육 사업을, 1980년대에는 보리, 수박, 땅콩 등 경작하였다고 한다. 1992년 장남 진영호가 귀농하면서 보리와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면서 장미와 카네이션 등 화훼 농업을 병행하여 관광농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관광객들의 경관 관광 욕구에 맞게 보리농사는 계속하고 콩을 메밀로 전환하여, 보리와 메밀을 번갈아 가면서 재배하면서 2004년 전국 최초 학원농장 주변이 ‘경관농업 특구’로 지정되었다. 2004년부터 매년 4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고 있다. 평소 걷는 학원 농장길과 달리 이학 여사가 거주했던 흙집과 공제선과 호랑이 왕대밭과 무밭을 지나 잉어못 쉼터를 본다. 청보리밭에 홀로 견디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 집착하는 사진을 찍고 연방죽과 숙골제에서 줄기만으로 내년 연꽃을 기대한다. 언덕배기의 길에서는 붉은 황토, 그리고 쪽파, 배추들이 길동무를 맞아준다.
노란 은행나무 잎새만 달리 능선을 지나면 청농원이다. 청농원은 라벤더와 핑크뮬리 그리고 오래된 한옥 펜션으로 알려진 곳이다. 작년 10월 나는 이곳 한옥 제실 ‘술암제’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배환정 동학 무장 접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솔깃하였다. 그리고 술암제에 진열된 액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계 배환정(裵煥廷)은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였다. 본관이 달성으로 1864년 이곳 청천마을 배후근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배환정은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무료로,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게는 약값의 반액만 받았다고 합니다. 지역민의 마음을 얻어 추대형식으로 무장 접주가 되어 손화중과 교분을 쌓고 황토재(정읍) 전투, 장성 황룡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합니다. 1894년 4월 27일에 전주성에 입성한 후 전주화약을 맺고 퇴각합니다. 그해 9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자 숨어지내다 체포되었지만, 평소 베푼 인덕으로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1943년 배환정을 위하여 술암제라는 제각을 지었다. 그 제각은 이제는 구조가 독특한 한옥 펜션으로 이용되고 있다. 핑크뮬리와 라벤더를 뒤로하고 조금 더 지나면 도착점인 공음면 청천마을이다. 이번 주는 고창군 공동체 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청천마을에서 마을 가꾸기를 위해 애쓰시는 청천마을 주민들과 상견례가 있었다. 아름다운 동행이 될 것같이 흐뭇하다. 따뜻한 차와 귤을 주시고, 마을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하다. 여백의 길, 길동무 두 분은 답례로 시를 낭송하여 마을 분들께 고마움을 표하였다. 1942년 만들어진 예전 저수지의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힘들어하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여백의 길동무들은 플로깅(plogging)을 하면서 걸어야겠다. 예정이 없던 행사를 위해 예전저수지에 반영된 황산을 촬영하면서 바람의 언덕을 걷었습니다. 맥랑이 있었던 곳에는 밭 콩흐(빈센트 반 고흐를 흉내 내, 밭에 쌓아져 있는 콩 덤이)를 보면서 중여마을을 지나 상예마을에 접어든다. 중여와 상예마을은 터 잡을 당시에는 ‘예지(예전)’이라고 불렀다. 상예 마을은 본디 상여(上餘)였다. 예측건대 마을 이름으로 상여라고 부르기에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상예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마을 분들이 한땀 한땀 수를 놓은 꽃수 목걸이와 팔지를 선물로 주셨다. 역시 부족하지만, 정현종의 방문객을 낭송하여 드렸고, 박oo 시인과 산골 소녀께서 시를 올려 드렸다. 정말 필경 환대임이 틀림없다. 여백의 길의 끝에서 웃음이 번진다.